ON. PLAN. MAKE

컴퓨터가 현대문명의 거울이 되는 시발점이 되는 시기는 1970년 이후 부터이다. 이 후 컴퓨터의 소형화, 경량화, 고성능화는 사용자 운영체제와 소프트웨어 응용분야 등 혁신적 발전의 발판을 마련하여 PC의 대중화, 즉 개인용 컴퓨터의 시대로의 서막을 알렸다. 이 같은 컴퓨터 시대로서의 도약은 이전에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일을 가능하게 하였다. 정보처리 능력의 증대는 복잡하고 섬세하게, 또 신속하게 계산되어야 하는 산업 분야에 사무자동화, 공장자동화를 통해 사회에 막대한 생산성과 수익성을 가져오는 블루오션을 가져다주었고 그에 관련된 많은 기술적 융합들은 다양한 매체간의 통합적인 교류가 가능한 디지털 사회를 생성해 냈다. 그 여파는 건축, 산업 등에만 국한되지 않고 시각예술 분야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텔레비전12갤러리에서 소개하는 왕지원, 이대철, 김병주, 이 3인의 작가들은 모두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통해 작품을 설계하고 계산하여 작품을 생산한다. 다양한 재료들이 실험되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현대미술에서 컴퓨터 기술을 예술에 접목하여 생성되는 새로운 예술적 시도들은 오늘 같은 기계 문명 시대에 당연한 흐름이 아닐까? 예술도구는 역사와 함께 발전을 거듭해 왔다. 과거에서는 생각하지 못한 도구가 재해석 되는 경우도 있고, 과거 쓰이던 재료들이 질적으로 향상되어 대체되는 경우도 있으며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비디오, 미디어, 컴퓨터 같은 새로운 도구의 출현도 있다. 왕지원, 이대철, 김병주 이 세 조소 작가들은 모두 80년대 초반 컴퓨터의 보급화와 맞물려 성장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감성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날로그와 디지털 그 모호한 경계 속에서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 새로운 조형미의 패러다임 속 그 중심에 있는 것이다.

왕지원 작가는 기계문명에 살고 있는 현시대의 인간 정체성을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한다. 작가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Inventor, CAD-Computer Aided Design)로 구현된 가상의 공간에서 자신을 닮은 사이보그 인형을 빚고 행동지침을 부여하는데 작가의 상상력, 즉 無에서 부터 생성된 이 기계적 신체는 흡사 부처의 모습을 한 神같은, 혹은 완벽한 聖人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센서와 모터와 같은 기계제어 장치에 의해 마치 인간과 같이 살아 움직이며 행동하지만 마치 해탈을 한 사람처럼 그 모습은 매우 동적이며 거룩하기까지 하다. 살아 움직이는 이 디지털 시대의 마리오네트(marionette)인형을 통해 작가는 미래의 인간문명, 혹은 기계문명 시대의 인간의 존재성에 대해 질문한다.


이대철 작가는 소리를 작품의 소재로 채택하고 조형화 시킨다. 컴퓨터 소프트웨어 (Pro-Tool, CAD-Computer Aided Design)를 통한 가상의 공간에서 형태를 지니지 못한, 청각적 정보를 시각화시키는데 이 과정에서 무형적 성질을 지닌 그 소리는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또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물체화 되고 구체화 된다. 시각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있는 소리는 본래의 그 성질이 배제되고 조형화되어 관객들에게 시각적, 촉감적인 정보로만 전해지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존재하는 소리나 사물은 인간이 인지하는 언어로, 그 본질성이 필터링 되고 본연의 존재성을 잃게 된다. 글자조각은 그러한 소리마저 정형화된 이미지화 시켜버린 것에 대한 반문이며 언어-특히 의성어, 의태어- 를 소재로 함은 말이라는 소리에 의해 변형되는 이미지를 그린 것이다.* “인간의 기호는 두고 있는 모든 것이 그렇듯이 현대의 언어도 그 본래의 목적으로 부터 이탈함으로부터 타락했다.”**

* 이대철 작가노트 中
**루소의 언어기원론 中


김병주 작가는 공간의 경계에 대해 이야기 한다. 시멘트로 벽이 쌓아 올라진, Interior와 Exterior가 통념적으로 구분되어지는 건축물을 해체시켜 면으로 차단되는 공간을 오직 선과 점으로 연결시킴으로서 안 과 밖의 경계를 재구성 하는 작업을 한다. 안 과 밖으로 구분되지 않는 공간들은 서로 충돌하고 중첩되어 건물의 구조를 쉽게 알 수 없게 되고 이런 벽들이 빛에 투영됨으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작업에는 수백 개의 철제가 복잡하게, 또 정확히 계산되어야 하는데 그가 사용하는 컴퓨터 소프트웨어(CAD-Computer Aided Design)는 이러한 작업을 가상의 공간에서 재현시켜 작업물이 좀 더 빠른 시간 안에, 정확히 구현시킬 수 있게 도와준다.


이 세 작가들은 누구보다도 더 진보한 기술들을 차용하고 있지만 세대를 대표하는, 컴퓨터의 기술을 통한 새로운 미술의 장을 개척하는 선두적 역할을 담당할 생각은 없다. 단지 기술이 지닌 본질적인 특질을 예술의 영역에 채용한다는 방향에서 현 미술시대의 흐름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로의 혁명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삶 자체로 디지털 감성이 예술의 실현의 하나이자 그 미학적 가치와 시각적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On. Plan. Make.'은 이 세 작가들의 컴퓨터를 통한 생각의 구상 및 작업 프로세스를 암시하는 단어의 조합으로 텔레비전12갤러리에서 개최하는 이번 전시를 통해 현대미술이란 커다란 변화의 바다 속에서 살아가며 실험하는 역량 있는 3인의 작가들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