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그림 · 큰마음

작은그림 · 큰마음

초대작가 | 김덕기, 김태호, 박성민, 송영방, 윤병락, 이두식, 이석주, 이왈종, 전광영, 지석철, 최석운, 황주리

김덕기 | 봄의 노래 | 34.8x27.2cm





김덕기 | 함께 하는 시간 | 34.8x27.2cm







<작은그림 · 큰마음> 전에 부쳐서
내게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게 하면서 동시에 어떤 대상이나 현상 혹은 상대에 대한 수용 능력을 넓혀주는 것, 그것이 바로 ‘아름답다’라고 하는 인식작용이다. 또 이런 느낌과 수용력을 키워주는 것이 바로 ‘아름답다’라는 인식이 가지는 가치이다. 그러면 ‘아름답다’라는 우리말의 어원은 어떻게 될까? 그보다 한자의 ‘美’에 대하여 먼저 말하면, ‘미’는 원래 ‘달다’라는 ‘감’(甘)의 뜻으로 ‘羊’과 ‘大’가 결합된 글자로 양이 살찌고 크면 맛이 좋다는 뜻이었다. 맛있다는 것은 바로 나에게 ‘快’(쾌)를 주는 것이고, 그렇게 될 때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한글의 ‘아름답다’의 어원에 관한 설명은 시인 조지훈의 말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아름다움의 어원은 ‘알음知다움’도 아니요, ‘아람實다움’도 아니다. 현대어 知 · 實보다는 더 오랜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아름다움의 ‘아’은 ‘私’의 古訓이다. 民의 通訓 성(百姓)의 俗訓도 아이지만 이는 私民의 뜻이므로 私의 訓 ‘아’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아름다움은 제 미의식에 맞는 제 가치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란 말로서 대상이 (또는 대상에서) ‘저’ 곧 ‘各自=私’와 같을 때 (또는 발견할 때) 느끼는 감정이란 말이 된다. 미적 체험의 개성적 판단과 그 상위성을 우리말은 어원 자체로서 이미 애초부터 인식했다고 할 수 있다.(조지훈, 『한국인과 문학사상』) 

이처럼 우리말 ‘아름답다’는 자신의 미적인 판단에 의해 어떤 대상과 내가 동일하게 여겨질 때 사용하는 단어로 영어의 ‘beautiful’ 이나 한자 ‘美’보다 더 적합하게 미적 인식작용을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나와 남이 서로 동일하게 아름다움을 느끼고 인식할 때 자신의 느낌을 당당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이라는 감성을 공유하는 것은 나와 남, 그리고 대상에서 동질성을 확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김태호 | Internal | 2011 | 32,26.6x18.6cm


김태호 | Internal | 2011 | 32,26.6x18.6cm





송영방 | 꽃게 | 40x25cm | 종이에수묵담채





송영방 | 매화 | 51x24cm | 종이에수묵담채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감각적이건 정신적인 것이건 나와 남, 곧 우리가 동일한 미의식 혹은 가치기준에 부합되어 선(善), 진(眞), 유익(有益), 쾌적(快適)이라는 인간존재의 궁극적 가치를 추구하는 우리들 삶의 목표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식감성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문화생활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미와 예술의 정체성과 그 가치를 이해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말로 “아름답다" 혹은 “아름다워”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정확한 표현이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의식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나의 미적기준 혹은 안목에 적합한 것에 대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행위에 대한 망설임을 버리고, 자신의 삶 속에 아름다운 것으로 가득 차게 만들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문화행동이 필요하다. 이번에 노화랑에서 열리는 <작은그림 ․ 큰마음> 기획전은 이런 아름다움을 느끼고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이 기획전은 올해로 벌써 여덟 번째이고, 첫 회는 이미 십수 년 전에 시작했을 정도로 관록이 붙었다. 미술애호가들이나 미술문화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전시이기도 하다. 이번에 초대되는 작가는 김덕기, 김태호, 박성민, 송영방, 윤병락, 이두식, 이석주, 이왈종, 전광영, 지석철, 최석운, 황주리(이상 가나다순)이다. 이들의 예술성향과 작품을 일일이 거론하는 것은 이글에서 무의미할 정도로 이미 평가받은 작가들이다. 



윤병락 | 가을향기 | 45x45cm




윤병락 | GreenApple | 48x46.5cm




다만 이들의 작품에서 자신에게 쾌를 줄 수 있는 것, 자신의 미의식과 인식 가치기준에 적합한 아름다운 작품을 찾아내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선결해야 할 필요조건이 아닌, 충분조건이 있다. 예를 들어 전시장에서 작품을 감상하고 난 뒤 자신의 안목에 적합한 즉 아름다운 그림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이다. 
이것은 정확한 진단이라고 할 수 없지만, 일정 부분은 자신이 어느 정도의 미적안목 혹은 미술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능력한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또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미적 수준에 적합한 작품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 생기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원인의 하나는 그림은 보는 것이고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다 안다고 치부해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이해이고 관념이다. 이런 오해와 관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이는 대로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미적안목과 아름다움에 대한 수준을 높여야 하는 공부가 필요한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즉 자신의 미적 수준을, 미적 안목을 넓히고 높여야 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두식



이두식



이왈종 | 제주생활의 중도 | 23x17cm





이왈종 | 제주생활의 중도 | 23x16cm




전광영 | AggregationA001 | 25X34cm





전광영 | AggregationA021 | 34X25cm




예전에 이런 말이 있었는데, 노는 것 즉 풍류에도 법도가 있고 격이 있다는 말이다. 노는데 무슨 격이 있고 풍류가 있나할지 모르지만 분명히 있다. 수준 있게 놀려면 잘 배워야 하고, 배워야 잘 놀 수 있는 것이다. 시조 한 수를 읊는데도 법도가 있고, 춤추는 발걸음에도 순서가 있고, 손동작에도 절도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거문고를 타는 것도 당연히 배워야 하지만, 듣는 것도 배워야 한다. 한마디로 품위와 격이 있는 문화를 즐길 수 있으려면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음악회도 가고, 연극도 보러가고, 미술관에도 가서, 수준있는 문화를 보고 듣고 즐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제대로 된 음악을 구별 할 줄 아는 귀를 만들어야 하고, 미술관이나 화랑에 가서 좋은 그림을 보고 미적인 안목을 키워야 한다. 이렇게 문화를 즐기기 위해서는 노력과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서 몸에 자연스럽게 체득되도록 해야 한다. 이런 것을 소위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이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그림을 안다고 하는 사람이나,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거나 할 것 없이 입에 자주 올리는 말에, 현대미술은 ‘어렵다’거나 ‘모른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현대미술은 더 이상은 그린다는 행위에만 머물지 않는다. 남성 소변기로 만든 뒤샹의 『샘』이 당시 미술계에서 거부된 이후의 현대미술은 중구난방으로 흩어졌다. 대상을 모방하고, 감정을 표현하거나 혹은 숭고한 문학적 주제를 재구성하는 고상한 관념에 반대한 미술은 추상이라는 난해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20세기 초 예술작품이란 본질적으로 작가의 독특한 시-지각(視-知覺)의 결과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만들어진 창조물이라는 주장은 당시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이들의 관심은 인간정신 탐구에 두게 되었고, 그림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고 이해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20세기 초에 ‘뜨거운 추상’이나 ‘차가운 추상’ 등등의 작품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제 현실세계를 모방하는 것에서 관심이 떠난 작가들은 인간 정신세계를 탐구하고 그것을 시각화하기 위한 새로운 모습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산업이 발전하면 할수록, 첨단기술이 등장할수록 미술은 이들을 철저히 이용했다. 더 이상 미술은 넘지 못할 영역이 없다. 자신의 영역만이 아니라 이웃의 문화영역까지 넘나들고 있다. 그래서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고 감상하고 즐기기까지 하려면 적어도, 그림이 자신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림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여유를 주어야 하는 것이다. 느긋하게 천천히 그림에 눈길을 보내서 말을 걸어오도록 기다려야 한다. 그럴 틈도 없이 지나 가버리는 관람객에게 그림은 절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림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자세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그림을 쳐다볼 때, 비로소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작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어렴풋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러고도 이해가 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그림을 이해하길 포기하든지 아니면, 책을 찾아서 읽어야 한다.     

지석철 부재(Nonexistence),30.1x13.2cm






지석철 부재의기억, 27.6x20.7cm2011



최석운 나는 잘 있다,33.4x24.2cm


최석운 | 4월의 유채밭\33.4xcm






황주리 | 그대안의 풍경 | 지름25cm






황주리 | 식물학 | 24x19cm




매년 봄은 오지만 그것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그 새로움에 눈을 뜨고 인식하면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자신의 안목에 달린 것이리라. <작은그림 ․ 큰마음>에 출품되는 작품도 이 범주에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임창섭(미술평론가 ․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