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웅 전

김 웅 (Woong Kim)의 회화 -기억을 머금은 표면
 

박영택 Youngtaik Park
(경기대교수, 미술평론) Art Critic & Professor of Kyunggi University of Arts
 
어둑어둑한 방안에 빛나는 나전칠기의 화려함, 자개가 검은 옻칠 속에서 빛을 얻는 그런 풍경이 떠오른다. 그런가하면 콩기름을 먹여 반들거리는 장판의 질감과 빛남, 더러 불에 타 검게 그을어 갈라진 상처가 부감되기도 하고 소박한 목리(木理)가 드러나는 소박한 목가구의 표면과 장석, 베갯모의 작은 우주 안으로 들어온 온갖 길상무늬를 빚어내는 자수가 한 폭의 꽃이나 오월의 나뭇잎처럼 현란한 색채로 피어나는 장면도 황홀하게 떠오른다. 부귀다남 같은 길상어문의 장식과 십장생 무늬 등은 사실 현실이라기보다 모두 꿈속에서 본 것 같은 판타지의 산물이다. 옛사람들은 그런 상상력을 현실에서 사용하는 물건의 피부 위로 불러내어 공들여 치장했다. 그런가하면 색색의 작은 천 조각을 이러 붙인 조각보의 기하학적 무늬와 질서도 연상된다. 실패나 골무, 농기구나 밥상, 이러저러한 연장들도 그 사이사이에 고여 있다.
 
김 웅의 화면은 기억 속에 잠긴 온갖 이미지를 저장해 둔 지층이다. 흙속에 깊숙이 묻힌 유물이나 의식 아래 잠긴 아득한 추억의 사물들이 빛바랜 색채와 지워진 형상, 여러 겹의 레이어를 두른 질감을 두르고 포개어져 있다. 작가에게 있어 세계는 일상 속에서 매 순간 그것의 존재를 알려오는 대상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을 가시화하는 작가의 시선을 우리는 추상적인 눈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일상의 사물들은 과거의 기억 속에 자리한 추억의 사물들과 겹쳐져서 다가온다. 그는 유년의 기억 속에 자리한 물건들의 표면과 색채, 형상에서 독특한 추상성을 발견하고 이를 풍성하고 두툼한 추상회화의 방법론 안에서 숙성시키고 발효시킨다. 무엇인가 전통적인 것을 은연중 환기하면서 추상과 구상 중간 지점의 어떤 것으로 변화한다. 그는 한국적인 전통을 씨줄 삼고 세계적인 당대성을 날줄 삼아 매혹적인 창조에 도달하고 있다.
 
김 웅의 화면은 복잡하고 깊고 두텁다. 그의 화면이 보여주는 두툼한 부피와 깊이는 어떤 동경과 회상, 아련한 상실의 비애를 감싸 안고 있다. 그것은 단지 표면위에 올려진 이미지나 표면 자체가 내용이 되는 차원만은 아니다. 그의 그림은 그 피부에 전적으로 다 있다. 그러나 그 피부는 심층적인 피부다. 모든 깊이와 상상과 이야기와 시간의 흔적들을 표면으로 불러들이고 펼쳐 보이면서도 심연을 간작한 아이러니, 모순적인 피부다. 그 표면은 기억을 축적하는 공간이자 동시에 시간의 결을 누적시키고 이른바 추억의 고고학적 지층을 성형하는 기이한 표면이다. 따라서 그 표면은 일정한 두께와 질감, 여러 조각조각들이 잇대어지고 포개진 상황들로 자욱하다. 그는 사각형 화면의 표면을 전면적으로 덮어 또 다른 세계의 지층을 열어 보인다. 무의 공간, 알 수 없는 미혹의 공간에 가시적 영역을 설정하고 그 영토를 비밀스럽고 암시적이며 매혹적인 시각의 장으로 가꾸는 것이다. 이 회화는 화면을 색채와 붓질, 물감의 층위로 덮어 조형적인 가공의 완벽한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조형성의 근본을 매우 피직하게 보여준다. 그는 유화물감을 매개로 연금술을 구사한다. 때론 납이나 청동처럼, 때로는 타일이나 벽돌담, 장판처럼 표면을 연출하고 있다. 유화 물감만으로 자신이 원하는 질감, 느낌을 자유로이 구사하는 것이다. 콜라주의 자국마냥 부풀고 융기된 표면은 다양한 조각들이 얹혀 있어 미묘한 질감과 표정이 부여되면서 흡사 우리네 옛 궁궐의 꽃담이나 방안의 장판지를 붙여나간 자국들이 자연스레 연상되는 것이다. 어떤 그림은 고분벽화를 연상시킨다. 해와 달, 별자리와 방위의 신들이 기호와 상징으로 표명되고 호출되어 있는 듯한 그림, 부적과도 같은 이미지는 아득한 신화와 역사의 시원을 보여주고 일깨운다. 사실 상징과 기호, 신화란 인간이 상실한 낙원(행복)에 대한 추억을 상기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들이다. 작가에게 있어 그림이란 잊혀지고 지워진, 그러나 선명하게 달려들고 상기되는 추억과 기억, 시간의 여운 들을 안쓰럽게 호명하고 그것을 살려내고 다시 육체를 입히고 다듬어 자신에게 절실한 문장으로 만드는 행위와 일치한다. 그래서 화면은 오랜 시간과 풍화 속에서 녹아내리고 부식되고 마모된 것 마냥 아늑한 세월의 입김과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결국 이 그림은 작가의 신체와 시간이 주어진 화면이란 별개의 공간에서 삶을 살아간 자취로 고정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화면, 공간에 자기 유년의 기억이나 지난 생의 추억과 이런 저런 생각들을 그림의 재료들로 번안하고 이를 충실하게 기록했다고 한다.
 
그는 전통을 기억의 형태로 몸 속 가득히 저장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다. 고국을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떠나기 전의 추억을 온전히 저장하고 있다. 오히려 이곳에 사는 이보다 그의 기억 속 시간은 불변하고 침전되어 더욱 생생히 과거의 순간을 간직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전통이란 이른바 필요할 때 마다 꺼내 쓸 수 있는 기억 속의 심상인 셈이다. 김 웅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장판, 보자기, 민속기물, 깨지고 눌러 붙은, 장판의 느낌이자 자개장 등 사물로부터 환생한다. 그 사물들에 대한 촉감, 지각, 기억의 이마주가 그의 작품의 원천이다. 사물로부터 특정한 일부만을 간결하게 추출하여 바라보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미술에 있어서의 추상의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세상으로부터 특정한 형태, 감정, 요소들을 추출하여 그것만을 강조하면서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김웅 역시 소재의 일상적 이면에 놓여있는 비범한 특성들을 그려낸다. 그는 기억 속에 저장된 사물의 피부를 떠올린다. 그 피부를 화면에 구축한다. 화면에 잠긴 작은 조각들은 화면에 시선의 굴절과 깊이를 은연중 부여한다. 그리고 윤곽선은 모종의 형태를 지향하다가 이내 스스로 자족적인 하나의 경계를 만들다 멈추었다. 화면이란 공간은 다시 무수한 공간으로 쪼개지고 분열되고 흩어지다가 이내 전체적인 구조 속으로 단단하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복잡하고 촘촘하게 직조되고 맞물린 저부조의 표면처리가 황홀하다. 그 조각조각들은 시간과 기억의 편린들을 머금고 있는 단위들이다. 현재가 감각을 통해 인식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과거는 오직 기억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기억의 형태로 몸 속에 저장된 전통이 그가 물려받아 자신의 작품 구석구석에 숨겨놓은 토속적인 자기의 원천이다. 그것이 그의 작품이다. 흐르고 망실되는 시간의 일방적인 흐름에 저항하는 것은, 바로 기억이다. 기억은 흐르는 시간의 질서에 거역함으로써 세월의 무상함을 넘어서는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된다. 김 웅 작품의 정체성 역시 그런 맥락에서 탄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