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의환 전

Flux로 이름 붙여진 시간

“지금 어쩌면 사진의 가능성은 예술의 가능성이며 예술은 사진에 의해 가능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하도 오래 돼 그 이름은 잊었지만, 1980년 쯤 일본의 어느 예술가가 했던 말이다. 그리고 30년이 지났다. 70년대를 통과하면서 사진은 ‘Art’의 중심으로 들어와 현대미술과 더불어, 혹은 현대미술 그 자체로 확장되고 정착하여 오늘에 이루고 있음을 우리가 보아왔던 그대로이다. 이제 사진은 또다시 디지털과 만나 전혀 짐작조차 못했던 풍경들을 만들고 있다. 최근 등장한 ‘Post Photography’라는 개념이 ‘사진 Photography’라는 개념을 넘어서 ‘사진 이후를 시사하고 있듯이, 어쩌면 ‘사진’이라는 용어가 내포해 왔던 의미는 송두리째 뒤바뀔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휴대전화로 영화를 찍어대는 시대에서는 사진이 오랫동안 지켜오던 신화도 이제 호랑이 담배 피던 이야기가 되고 있다고나 할까…. 사진고유의 미학적 범주가 굳건히 우리의 정서를 지킬 것 이라는 믿음 따위는 이제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사진은 이미 언어이며 동시에 공기와 같은 거대한 환경으로서인간의 문명적, 문화적 풍경의 기반 같은 것이 되고 있었다.
1970년대 초반 화가 고영훈은 작은 돌을 주어다 거대한 화폭에 정밀한 묘사력으로 옮겨놓고 있다. 그리고 2011년 디자이너로 오랫동안 살아온 조의환은 화석화된 나무 조각을 정교하게 찍어 커다란 인화지에 옮겨가고 있다. 한 쪽은 사물을 그렸고, 다른 한쪽은 그것을 찍어 남긴다. 이 두 사람의 묘사, 혹은 그리는 일은 매체부터가 다르지만. 바로 그 매체의 차이에서 사물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발생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회화가 현실의 자의적인 해석과 재구축의 과정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사진은 처음부터 빛의 파장을 ‘기록’해 가는 일, 즉 피사체의 물리적 자취를 ‘옮겨’ 놓는 일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조의환이 “FLUX는 시간에 대한 나의 새로운 사생이자 해석이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의 사진행위의 목표이자 이유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사진은 본질적으로 시간을 포함하여 동시에 존재의 흔적임을 간파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FLUX’로 이름 붙인 피사체, 그러니까 기나긴 시간을 통과하며 거의 화석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한 나무토막들은 이미 그 자체로 유장한 생명의 경이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조의환은 전혀 무감동한 촬영법으로, 그러니까 부드럽고 넓은 조명의 표면으로 사물을 덮어가는 방법을 통해 아주 이성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적 선택은 오랜 시간 사진과 더불어 살아온 그의 경험과 감수성에서 비롯된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조의환은 그가 선택한 오래된 나무토막들이 스스로가 가진 아우라에 의해서 이미 그 존재의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 또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사물(FLUX)을 그 자체로 알몸을 드러내게 하는 일…, 정교한 묘사(촬영)이외의 그 어떤 표현도 자재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조의환의 사진 개념을 지탱하는 포인트였다고나 할까?
조의환의 FLUX는 사물이 스스로 내뿜는 존재감으로 이내 觀者(관자)들의 시선을 붙들어 그 다양할 수밖에 없는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장구한 시간의 표정이 새겨진 FLUX의 형태 속에서 우리는 그 기나긴 시간에 대한 擬似(의사)체험을 하게 된다는 것, 바로 이쯤에서 조의환의 친절한 배려를 만날 수 있게 된다. 김장섭


flux004 | 140X105cm | pigment print | 2010


flux007 | 105X140cm | pigment print | 2010


flux010 | 140X105cm | pigment print | 2010


flux011 | 140X105cm | pigment print | 2010


flux018 | 105X140cm | pigment print | 2010


flux020 | 105X140cm | pigment print |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