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태: 말과글

유선태 | 말과 글-그림으로 그림을 그리다 | 218.2 x 290.9cm | Acrylic on canvas | 2011


유선태 | 말과 글-그림으로 그림을 그리다 | 259.1 x 193.9cm | Acrylic on canvas | 2010



유선태 | 말과 글-나의 정원 | 130.3 x 162.2cm | Acrylic on canvas | 2010


유선태 | 말과 글-동서양의 정물 | 97 x 130.3cm | Acrylic on canvas | 2010


유선태 | 말과 글-동양의 정신 | 227.3 x 181.8cm | Acrylic on canvas | 2010


유선태 | 말과 글-미인도 | 97 x 130cm | Acrylic on canvas | 2010


유선태 | 말과 글-사과 위에서의 명상_온고이지신 | 116.91 x 91cm | Acrylic on canvas | 2007


유선태 | 말과 글-삼형제 | 116.91 x 91cm | Acrylic on canvas | 2011


유선태 | 말과 글-아뜰리에 풍경 | 130.3 x 162.2cm | Acrylic on canvas | 2011
 
말과 글–자전거 타는 사람:그림으로 그림을 그리다


사고의 순환과 합류점으로서의 ‘여기 그리고 지금’에 대한 통찰

윤진섭(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Jin Sup Yoon


Ⅰ. 파리 체류와 마티에르의 실험 
파리에서의 유학 초기에 유선태는 사물의 마티에르에 관심을 가졌다. 지금은 세계 미술의 중심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이동을 했지만, 그가 그림공부를 하던 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파리는 아직 힘을 지니고 있었다. 독일의 신표현주의, 이태리의 트랜스아방가르드, 미국의 뉴페인팅과 함께 프랑의 신구상회화와 자유구상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풍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 무렵 불어 닥친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와 맞물려 구상 경향의 이들 사조가 세계 미술의 새로운 사조로 부상되기에 이른다. 이때만 해도 영국의 ‘yBa(young British artist)’는 아직 태동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골드스미스 대학을 졸업한 영국의 대미언 허스트가 역사적인 '프리즈 Freeze'展을 기획한 것이 1988년, 찰스 사치가 소장품을 전시해 '센세이션 Sensation'이란 전시 타이틀에 걸맞게 일대 선풍을 일으킨 때가 1998년인 것을 감안하면 프랑스는 여전히 유럽미술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구상회화가 주도하는 파리 화단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유선태는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위한 모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기본을 다지자는 일념 하에 마티에르에 대한 천착과 실험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평면과 입체를 동시에 시도한다.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물건에 대한 그의 집착이다. 어렸을 적부터 유선태는 자신의 눈길을 끄는 사물에 관심을 기울였다. 주변에 굴러다니는 돌에서부터 각종 생활용기들, 책, 활자, 타이프라이터, 병, 쇠나 동 제품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눈길을 끄는 것이면 가차 없이 수집을 했다. 서울에서 비롯한 이러한 그의 습관은 일 년 간에 걸친 독일 유학과 이후의 파리 생활로 이어졌다. 오래된 오브제들에 대한 그의 열정은 많은 다양한 오브제들이 그의 작품에 중요한 소재나 재료로 사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점이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첩경 가운데 하나다. 

Ⅱ. 동양과 서양의 융합, 상상 속으로
현재 보는 것과 같은 그의 다양한 작품세계가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한 서술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프랑스 유학 초기 그의 작업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는 나와의 대담에서 이 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중략, 독일을 거쳐 파리로 갔는데 거기서 마티에르에 심취했다. 평면하고 입체를 동시에 시도했는데, 철사를 종이 위에 놓고 서로 이질적인 사물의 물성을 탐구했다. 잉크 작업도 시도하면서 종이와 잉크 사이에서 파생되는 흑백의 콘트라스트에 주목했다. 그렇게 한 2년 정도 작업을 하니까 뭔가가 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콜라주와 페인팅을 병행하면서 작업의 방향을 찾아나갔다.” 

유선태는 그렇게 해서 완성된 작품을 가지고 화랑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화랑의 문은 생각처럼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일 년 간을 화랑가로 전전한 끝에 만난 곳이 라빈느 바스티유 화랑이었다. 전시회 요청이 온 것이다. 그 당시 유선태는 마티에르가 있는 회화, 오브제, 설치작업 등 광범위한 탐색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고민이 생겼다. 오브제와 설치는 그런대로 슬쩍 넘어갈 수 있지만, 회화만큼은 그 결과가 매우 정직하기 때문에 회화에 대한 일종의 강박관념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림을 그려 본 사람은 알겠지만 흰 종이 위에 그은 선은 영원히 남아 말을 건다. 작가의 실력을 가감 없이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회화의 흔적인 것이다. 일찍이 동양화에 심취한 적이 있는 유선태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특히 재료의 성격상 개칠이 허용되지 않는 동양화 필법의 수행적 측면은 그로 하여금 거의 강박적으로 회화에 몰입하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은 평면과 회화의 접맥, 그리고 거기에서 배태된 ‘무대적(mise en scène)’ 연출법은 그런 고심에서 나온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내가 지금 회화를 외면하면 향후 내 예술이 절름발이가 될 것 같은 예감 때문에 지속적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술회한 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배후를 넉넉히 한 셈이 된다. 그는 20여 년 간 끊임없이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이용하거나 혹은 자신이 직접 오브제들을 제작해왔다. 이는 그의 기민한 상상력의 원천이자 작품의 재료가 흘러나오는 수원(水源)이다. 그의 작품세계의 특징은 끊임없이 회화와 입체 사이의 접경을 탐색하는 데 있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오브제가 등장하는 게 아이러니라고 말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그에게는 평면과 입체의 구별이 없다는 뜻이다. 그림의 내용이 밖으로 나오면 입체나 설치가 되고, 거꾸로 밖의 입체나 설치물이 평면에 담기면 그림의 내용이 되는 것이 유선태 작품의 특징인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조작과 개입이 가능해진다. 
주지하듯이 변기를 둘러싼 마르셀 뒤샹의 저 유명한 ‘제시(presentation)’의 행위는 재현에 기반을 둔 회화적 패러다임(pictorial paradigm), 즉 고전적인 ‘재현(representation)’의 관례(convention)를 뒤엎은 일대 사건이었다. 그 후 현대미술에서 오브제의 광범위한 확산은 그것이 낯선 언어에서 벗어나 익숙한 언어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 만큼 이제는 오브제 자체가 충격을 주지는 못한다. 그것을 뒤집기 위해서는 또 다른 미학적 혁명이 일어나야 하지만, 그것이 과연 뭘까 하는 문제는 좀 더 고민을 해 봐야 한다. 
어쨌든 유선태에게 있어서 평면과 입체, 다시 말해서 이차원 세계와 삼차원 세계를 왕복하는 문제는 당시 그의 화두가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가 자신의 이러한 방법을 풀어 가는데 재현적 기법을 쓰는 이면에는 사물의 존재에 대한 탐구의 정신이 깔려있는 것 또한 눈여겨 볼 일이다. 가령, 그의 그림에는 자전거를 탄 자신의 모습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오브제나 설치작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 소재의 상호호환성, 즉 하나의 소재가 평면과 입체 사이를 자유롭게 왕복하는 것이야말로 존재의 ‘사물성(objecthood)’에 대한 탐구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림의 떡(畵中之餠)”이란 말이 있듯이, 그림 속의 떡은 어떤 부피도, 냄새도, 무게도 지니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한낱 가짜 이미지, 곧 허상(虛像)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또한 존재의 지반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과거를 회상하기도 하고 자신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이때 그들의 감상의 지반은 생활세계로부터 온다. 그런 이미지들이 없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되돌아볼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세계에 존재하는 허다한 이미지들은 자아의 반영으로서의 거울인 것이다. 투사(投射)란 그리하여 유선태의 작품에 잘 나타나 있듯이 인간의 중요한 감정 작용의 하나인 것이다. 

Ⅲ. 투사(投射)와 이동하는 인간의 메타포로서의 자전거 
이 자전거 타기는 자전거만이 유일한 이동수단이었던 그의 학창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의 자전거의 메타포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동이다. 자전거를 타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것, 즉 이동은 인간의 한 특징적 양상이기도 하다. 물론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이 이동의 특징을 보여주지만, 인간의 이동은 단순히 생물학적 차원의 생존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문화적 내지는 지적 욕구의 충족을 위해서 이동한다는 점이 동물의 그것과 다르다. 이 이동을 가리켜 포괄적으로 ‘유목(nomad)’이라고 부르면, 유선태의 경우에 그것은 동양과 서양의 융합(convergence)이 된다. 일찍이 그가 동양화에 심취했다는 것과 프랑스로 유학을 가 오랜 기간을 머문 사실은 이 동서의 융합을 위한 기반이 갖춰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가 본 물상들, 그가 경험한 문화의 차이, 미술의 경우엔 그가 배운 표현의 방법론을 비롯하여 세계를 보고 해석하는 틀이나 관점의 차이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일례로 그의 그림에는 초현실주의를 연상케 하는 요소들이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을 겉으로만 파악하여 초현실주의의 레테르를 붙이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 속의 사물들은 상상의 분비물이 아니라, 현실에서 그와 늘 벗해 온 현실의 사물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자아가 투사된 메타포로서의 현실공간이지 현실을 벗어난 무의식의 세계, 즉 초현실의 공간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내가 앞에서 애써 강조한 사물의 수집 취미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가 앞에서 평면과 오브제의 사이를 왕복한다고 했을 때, 그 말의 진의는 두 개의 풍경을 가로지르는 데 있다고 하는 편이 보다 온당한 해석이 될 것이다. 그는 현실의 공간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이미지의 세계, 즉 현실이 아닌 이차원의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그림속의 떡’은 현실의 떡이 아니다. 하지만 상상의 세계에서는 가능하다. 그가 자전거를 타고 이차원 이미지의 세계를 유영하는 것은 이러한 내면의식의 풍경과 관련이 있다. 그의 그림 속에서 자전거를 탄 모습은 다른 것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작게 그려져 있다(이 점이 그의 그림을 초현실적으로 보이게 하는 주요인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 속의 사물들은 초현실주의 주요 기법인 환치에 의한 충격보다는 고즈넉한 풍경 속에서 상호 친화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자신보다 큰 나무, 책, 포르테 음표, 사다리, 이젤, 사과 등 갖은 사물들 사이를 쏘다닌다. 그것은 얼핏 유영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마치 그렇게 생각하는 뇌 속을 다니는 것과 같은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Ⅳ. 박물지(博物誌)로서의 그림과 글쓰기 
유선태의 그림은 박물지적 요소가 짙다. 조금 과장하자면 동양과 서양의 갖은 물상들이 모여든 이미지의 저수지가 바로 그의 그림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공간적으로는 동양과 서양, 시간적으로는 옛것과 오늘의 것의 혼합이다. 그것을 가리켜 그는 숲이라고 말한다. 그는 동서양의 거장들이 일군 그 숲에서 유영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유선태 특유의 혼융(convergence)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발효의 작용이 뒤따른다. 날 것 그대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푹 익히고 고아서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일, 즉 체화(體化)하는 것이다. 여기에 화학적 작용이 가세한다. 동양과 서양의 것을 서로 섞어서 푹 달이는 일이 바로 그가 하는 일인 것이다. 그는 한약의 탕을 내듯이 재료를 달이는데, 비유컨대 액즙이 그 자신의 것이라면 짜고 남은 찌꺼기는 우리가 그의 그림에서 보는 동서양 명화의 이미지들이다. 그것을 겉만 두루 살펴 포스트모던적 차용(appropriation)이라 폄하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물론 그의 그림에는 그런 오해를 살만한 요소가 있다. 피카소의 우는 여인을 비롯하여 앤디워홀의 자화상,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만화 이미지,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이미지' 등등 우리의 눈에 익은 서양의 명화들이 인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동양화를 소재로 한 작품에서도 그대로 발견된다. 강희안의 그림을 비롯하여 신사임당, 호랑이 민화, 겸재 정선 등 고전 명화가 차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용의 방법론은 작가적 시선에서 볼 때 하나의 재료에 불과하다. 그도 말하고 있듯이 예술이라는 숲에서 서성거리며 낙엽을 줍듯이, 이미지의 채집을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일하지 않고 과실을 얻는 것, 즉 불로득낙과(不勞得落果)가 아닌 까닭은 그것에 대한 그의 독자적인 해석에 있다. 나는 이 점을 매우 높이 평가하는데 사실 그 특유의 융합(convergence)의 정신은 바로 여기서 나오고 있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을 비롯한 한국의 고전명화에 손질을 가해 자기화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이는 창조성이 고갈된 현실, 즉 포스트모던적 상황에서 말하자면 거대 담론이 사라진 현실에서 작가란 대가의 것을 비틀거나 새롭게 짜는(織造) 사람에 불과하다는 현실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가 작품의 여백에 빼곡히 글쓰기를 시도하는 일은 그러한 현실을 딛고 일어서려는 의지의 소산이다. 얼핏 보면 그림의 표면에 미세하게 발생한 균열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가 일일이 손으로 쓴 ‘글쓰기(écriture)’인 것은 그것이 단순히 눈속임의 차원을 넘어 현대미술의 운명에 대한 나름대로의 저항적 의미를 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동양화에서의 여백은 전통적으로 공유의 장(場)으로 간주돼 온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중국이건 한국이건 간에 전통적으로 그림의 여백은 그린이의 서명과 화제(畵題), 낙관이 찍히는 곳이다. 그런데 이는 비단 작가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소장자 역시 대대로 여백에 그림을 감상한 화제를 쓰고 서명과 낙관을 찍은 것이다. 이는 서명 외에는 글씨기를 기피한 서양의 전통이나 관례에서는 찾기 힘든 사례이다. 즉 회화 공간에 대한 해석이나 관점이 동서 간에 현저히 달랐던 것이다. 
동양화 재료로 동양화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아크릴 칼라로 동양화를 그리는 유선태의 방법은 동서양의 횡단을 통해 상호간 교호(交互)의 작용을 꾀하는 일이다. 이는 애초에 그가 특유의 박물지적 관심을 보일 때부터 예견된 일이다. 그 특유의 기질과도 맞닿아 있는 이 독특한 미적 취미는 쌓여있는 책들을 그린 그림이나 마치 골동품 가게의 풍경을 옮겨 놓은 듯한 그림들에서 쉽게 엿볼 수 있다. 거기에도 역시 예의 자전거 타는 자화상이 등장하고 있거니와, 그는 마치 자전거를 타고 유람이라도 하듯이 문명의 횡단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동양화의 원작 일부를 비우고 거기에 자신의 그림을 삽입하거나, 두 개의 서로 원작을 합쳐 제 2의 그림을 만드는 것 등의 재창조 행위는 ‘개입’의 시선에 다름 아니다. 타이프라이터를 이용한 작품은 이러한 개입의 시선이 잘 드러난 오브제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다. 영어로 된 자판에 위, 즉 종이가 놓이는 위치에 한자의 활자판을 놓아 대비시킨 것은 자신의 이중적 정체성에 대한 메타포적 성격이 잘 드러난 수작(秀作)이다. 프랑스에서는 동양적 냄새가 난다하고 한국에서는 서양적 냄새가 난다는 식의 분열적 해석에 대해 자기 나름의 상징성을 부여한 것이 바로 이 작품인 것이다. 

Ⅴ. 말과 글, 쓰기의 역 발상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옛날에 미처 몰랐던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수가 있다. 그것은 지적 성숙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많은 경험을 통한 체감에 의한 것이다. 몸으로 부딪힌다는 것만큼 직접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무를 바라보면서 느낀 유선태의 정신적 체험은 나무의 생명성과 관련된 것이다. 그 체험의 내용을 보자. 

“어려서부터 나무를 좋아했던 아버지 덕에 나무를 늘 봐왔는데, 정작 나무의 생명성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양평의 작업실 앞에 서 있는 나무의 잎이 하루아침에 졌는데, 그 헐벗은 나목을 보고 있자니 그 자체가 예술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럼 그 나뭇잎은 뭐였나 하고 생각하니, 그 많은 잎들이 바로 말들이 아니었나 하는 데 생각이 미쳤죠. 아니면 글 일수도 있고......”
-유선태, 필자와의 인터뷰 중에서-

그는 말과 글의 관계가 꼭 동양화와 서양화의 관계와 같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비유컨대 마음과 몸의 관계와도 같다. 그도 언급한 것처럼 “말이라는 것은 뱉으면 순식간에 사라지지만 한번 뱉으면 그것으로 결정되는 성질과, 반대로 글은 썼다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 물론 그것은 일기처럼 쓰고 지울 수 있는 글의 속성을 개인적 차원에서 빗댄 것이긴 하지만, 말과 글의 관계가 지닌 이 상호보완성은 동양성과 서양성이 관류하는 유기체로서 유선태의 몸이 지닌 문화적 통합을 드러내 보여준다. 즉 문화의 담지체(擔持體)로서의 몸성에 대한 통찰인 것이다. 

Ⅵ. 사고의 순환과 합류점으로서의 ‘여기 그리고 지금’ 내가 사는 곳
인간은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사는 이곳에 믿음을 갖고 사는 존재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 그 모국어가 있는 곳, 말이 통하고 정이 서로 통하는 쪽에 머리를 두고 싶은 것이 인간이다. 다시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면 ‘고향(die Heimat)’을 그리워하는 존재다. 그 고향이 자연에 다름 아닐진대, 기술 산업사회에서 한낱 도구적 존재로 전락한 인간에게 예술과 자연은 잃어버린 본향을 찾아가는데 필요한 유일한 길이다. 유선태가 거대한 설치작품을 통해 관객 스스로의 뒤를 보도록 유도한 것처럼, 그의 작품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가 구사하는 참신한 기법들과 내용은 사물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새롭게 일깨워준다. 나는 이야말로 유선태의 예술이 지닌 힘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본다. 동양과 서양의 만남을 통해 유감없는 화해를 시도해 보는 일, 편견과 이념을 초월하여 상호 충돌하고 교호(交互)하는 가운데 그 이율배반을 드러내고 동시에 갈등과 모순을 녹여내는 일, 그리하여 그 나름대로의 피륙을 직조해 내는 일, 그것이야말로 소박하지만 거창하지 않은 그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것이야말로 동서양을 아우르는 사고의 순환과 합류점으로서의 ‘여기 그리고 지금(hic et nunc)’, 즉 내가 뿌리를 내리고 사는 곳에 대한 뜨거운 긍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