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첫 기획전시인 아이작 줄리언의 는 그가 한국에서 갖는 첫번째 개인전이기도 하다. 영상 작업을 기반으로 영국을 대표하는 미술 작가인 그는 2004년 부산비엔날레 현대미술전의 , 그리고 2008년 광주비엔날레의 를 통해 국내에서 비디오 설치미술의 새로운 차원을 선보인 적이 있다.
Ten Thousand Waves는 작가가 지난 4년여의 작업 끝에 완성한 상영시간 55분짜리 영화를 바탕으로 한 3 채널 비디오 설치작품이다. 2010 시드니 비엔날레에서 첫 선을 보인 이 작업은 그 동안 상하이, 마이애미, 런던에서 9 채널 비디오 설치작품으로 보여졌으나, 이번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는 전시공간 구조의 특성에 따라 3 채널 버전으로 새롭게 고안되었다. 는 대부분의 주요 장면이 중국 현지에서 촬영되었으며 특히 세계적인 여배우 장만옥(Maggie Cheung)과 지아장커(Jia Zhangke) 감독의 영화 <24 시티>의 주연배우 자오 타오(Zhao Tao)등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여배우들의 출연으로 화제가 된 아티스트 필름이기도 하다. 그 밖에도 국제적으로 주목 받고 있는 중국의 신세대 비디오 작가 양푸동(Yang Fudong)과 시인 왕핑(Wang Ping) 그리고 중국 서예의 대가 공 파겐(Gong Fagen) 등이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 시인 왕핑은 중국과 런던을 오가며 작품 구상단계부터 아이작 줄리언과의 대화를 통해 영화 전편에 보이스 오프로 들리는 시편들을 창작했다.
Ten Thousand Waves의 대략적인 스토리라인은 세 개의 층위로 구성된다. 출발점은 장만옥이 역할을 맡은 여신 마주 (Mazu)와 관련된 중국 전설이다. 이 오래된 전설에 의하면 마주는 바다의 여신으로 조난당한 선원들을 해안까지 안전하게 호송하는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아이작 줄리언은 이 여신을 현대 중국의 상황 속으로 불러낸다. 마주는 상하이 도심의 교통체증 장면들과 이와 극도로 대조되는 대나무 숲과 사암이 가득한 산들의 절경, 이 양자 사이를 시?공간의 제약을 초월하며 날아다닌다. 두 번째 스토리라인은 영국의 해안가에서 새조개를 채취하던 중국 출신의 불법 이민 노동자 23명의 죽음에 대한 사고를 다룬다. 대서양 연안의 만조시간을 잘 몰랐던 이 중국인 노동자들은 2005년 봄 불의의 사고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들의 수호신이었던 마주 조차 이들의 죽음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마지막 스토리라인은 20세기 초 상하이의 특수한 상황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시퀀스들로 구성된다. 서구 열강제국들이 분할 점령하고 있던 당시의 상하이는 1930년대에 영화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 가운데 <여신The Goddess>(1934)이란 영화는 어린 자식과 더불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매춘까지 마다할 수 없었던 한 여인의 비극적 삶을 다룬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아이작 줄리언은 이 영화를 리메이킹하면서 30년대 상하이의 분위기를 되살린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 역은 자오 타오가 분한다. 이러한 세 층위의 스토리라인이 서로 교직 하면서 는 과거와 현재, 허구와 현실, 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넘나든다.
마치 외과의사의 정교한 메스와 같이 아이작 줄리언은 영화의 시퀀스(sequence), 씬(scene), 샷(shot)을 날카롭게 해부하고 한편의 영화를 복합적인 현대미술의 설치 장치로 재조합해낸다. 때로는 내러티브로 때로는 독백이나 해설로 삽입되는 매우 정교한 배경 사운드는 이 비디오 설치작품의 또 다른 매력을 증폭시켜준다. 중국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현대 사회의 회피할 수 없는 이러한 참사들이 서로 뒤엉킨 이 작품의 내러티브 구조는 이미 아이작 줄리언이 이전 작품에서 줄곧 다루어왔던 주제들과 연장선상에 있다. 탈식민주의와 글로벌 경제구조에 기인한 부단한 노동 이주의 문제 등은 이전 작품 <웨스턴 유니언>에서도 부각되었던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미학적, 사회적, 심리적 차원들이 정교하게 결합된 그의 비디오 설치작업은 관객들로 하여금 영상이 프로젝션 되는 공간 안에서 부유하는 듯한 지각경험을 유도하면서 서구중심의 글로벌 문화 전반에 대한 심각한 문제 제기를 던져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