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겸 Space-less

「정신적 영역으로 열어가는 조각」 - 김인겸

예술이란 스승과의 만남을 위해 길을 나선지 꽤나 오랜 시간이 흘러갔다. 그 시점을 70년대 초반 내가 대학을 졸업할 즈음으로 본다면 40년에 가까운 긴 시간이다. 스승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처음 으로 마음속에 만나 본 것도 그 즈음으로, 그 기억은 강한 마력이었고 지금까지 작가로서의 나를 이끌어 온 힘이었고 희망이었다. 그 후 나는 줄곧 그를 찾았고 그는 멀리에서 때론 아주 가까이에 서도 내게 다가와 주었다. 그는 있는 듯 없었고 없는 듯 있어서 분명히 내 손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스승의 정체를 찾아 세상에 알리는 일에 의미를 가지어왔다 할 것이다. 그는 무한이었고 영원이었다. 그리고 초월이었다. 무채색으로 내 몸을 줄이고 무한의 질서 속에 나도 같이 있다.

작품집을 출간하겠다고 지난 자료들을 찾아 모으다 보니 잊혀졌던 작품들과 함께 지워졌던 일들 또한 새삼 떠오르며 피어난 기억이 하나둘씩 또 다른 기억들을 불러 세우니 제법 많은 감회들이 쌓여 진다. 나 자신도 이제 어쩔 수 없이 세월 풍파 따라 많이 마모되었구나 싶은 즈음, 지난 시간들의 작품을 대하니 다시 마음에 새살이 돋고 각이 살아나는 듯 의기가 생기니 때론 지나간 흔적들을 둘러보며 지금의 내 자리를 확인해 보는 것도 일면 필요한 일인 듯싶다.

때마다 한두 마디씩 메모 해둔 내 생각들과 함께 작품들의 줄기를 시기별로 이어 보니 그간 내가 해온 작품들의 면모마다에 의욕이 앞섰던 도전과 실험의 연속이었음이 드러난다. 시기마다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들이 달랐고 그것들이 요구하는 대로 이끌리며 또 이끌어가며 지내다보니 대나무처럼 여러 마디가 하나로 곧게 이어진 그런 줄기가 되었는데, 각개의 마디에 비친 내 생각들의 색깔이 마치 철따라 다른 옷을 갈아입는 나무처럼 때론 풍성하기도 때론 메마르기도 때론 차고 때론 빈 그런 다양한 모양이 되었다. 내친김에 몇 마디 더 이어 세우던지 옆에 따로 한두 뿌리 더 심어도 좋을 듯한 생각들이 일어나며 다시 내 마음을 움직인다.

1992년도에 의욕적으로 시작했던 PROJECT 시리즈는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출품했던 PROJECT 21을 끝으로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으니 PROJECT 시리즈의 새로운 버전을 기획해서 당시에 주장 했던 자신의 약속이 어떻게 새롭게 전개 되어 갈 수 있을지를 시험해 보는 것도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 해왔던 작품들이 일개의 연주자적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나 자신의 조각적 실험을 해온 일들이었다면 PROJECT는 작품의 장을 총체적이고 객관적으로 펼쳐가는 기획으로, 지휘자적 입장으로의 전환을 시도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한편 80년대를 시작으로 내 작품 형성에 중요한 큰 마디를 이룬 묵시공간 (黙示空間) 시리즈 또한 소프트한 신소재 사용으로 그 2세대 작품을 내는 것도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1996년 Paris 생활의 초기에서 새롭게 시작한 먹 드로잉(Drawing Sculpture)은 무채색으로 일관해온 검은 깊이에서 나와서 보다 투명한 밝은 공간 속으로 색깔을 갈아입으며 마냥 즐거운 다양성을 열어내고 있어 앞으로도 나의 조각과 함께 늘 나란히 상호보완적 역할을 해 나가리라 본다. 조각적 작업에서 오는 번거로움과 무게를 내려놓고 정신을 집중시키고 마음을 평정해가는 데 잘 맞는 작업이어서 수시로 하고 있는 재미있는 작업이다.

근작 Space-less 시리즈는 1900년대 말부터 제작해온 빈 공간 (Emptiness) 시리즈에서 추구했던 조형의 영혼성 개념을 보다 구체화 시킨 작품들로 평면과 입체, 실체와 허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초공간적인 조각이라 할 수 있으며 물리적 공간과 사유의 공간이 하나 되는 시각적 일루전과 초월적 공간현상을 보여주는 Image Sculpture이다. 그 동안 해온 "조각 같지 않은 조각"에서 이제 "조각을 떠난 조각"으로의 이동이라고 할까 이것은 한마디로 정신적 영역으로 열어가는 조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작품의 줄기를 살펴보면 그것은 언제나 없는 곳에서는 있는 곳으로 있는 곳에서는 없는 곳으로 늘 반대급부에서 해법을 찾아가고 있었음을 볼 수 있으며 타고난 호기심과 저항성 때문인지 어느 한곳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던 시기가 발견되지 않는다. 한때는 의도적으로 작품의 외형적 생산을 거의 하지 않고 지낸 시간들도 많이 있었다. 작품의 생산은 그것을 해내는 것뿐 아니라 하지 않는 행위조차도 작품활동의 자기의미를 결정해가는 척도로서, 그 완급을 조절해나갈 필요가 있으며 그것은 마치 작품 속의 여백처럼 중요한 고유의 영역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긴 시간 동안 많은 작품을 해 왔으나 정작 작품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생산성이나 보존성이 떨어지는 작품을 해온 탓도 있겠지만 작품은 남기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추진해 나가고 있는 작가의 정신적 움직임과 판단, 행위 자체에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작업의 시작과 과정을 중요시했고 일이 끝날 무렵이면 이미 다른 생각들이 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일들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고 끝난 일은 애써 되돌아보지 못했던 탓도 있다. 어떤 좋은 생각도 내 마음이 움직이는 속도를 오랫동안 붙잡아 놓질 못했다. 어떤 지고의 주장이나 절대의 논리가 필요하지 않았고 절대의 목표를 두지도 않았다. 단지 나를 이끌어가는 내 정의와 환경 그리고 당시의 나와 그리고 나의 선택이 있을 뿐이었다.

이 책을 내면서 지난 시절의 일들을 돌이켜볼 수 있는 의미있는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선택했던 그 일들이 아주 작은 판단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흐르는 시간의 속도가 이제 내 마음의 속도보다 빨라졌다는 것과 함께...
Space-less, 2009 84x9x94cm, Acrylic urethane coating on stainless steel

Space-less, 2009 138×18×140cm, Acrylic urethane coating on stainless steel

Space-less, 2009 84x9x94cm, Acrylic urethane coating on stainless steel

Space-less, 2009 138×18×140cm, Acrylic urethane coating on stainless steel

Space-less, 2010 150×21×125cm, Stainless steel

Space-less, 2009 109×79cm, Ink on paper

Space-less, 2009 109×79cm, Ink on paper